
풀 내음을 담은 봄 바람결에 흐드러진 벚꽃잎이 머리끝을 스쳐 가고 코끝을 간질였다. 심성훈은 지금 큰 벚나무 아래에 서 있다. 지구에서 몇번이고 스쳐 간 봄의 기억들은 흑백의 무성영화처럼 심성훈의 삶에 큰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달랐다. 캠퍼스에서 함께 걸었던 벚꽃길의 눈부신 녹음과 꽃향기와 함께 코끝을 간질이던 샴푸 향기 그리고 함께 보러 갔던 푸르른 봄의 바다. 이제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지금 그 애와 함께 할 수 있어서.
'그때 그 시의 첫 구절이 뭐였더라….'
심성훈은 그 애와 써 내려가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 애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가 없는 시간 속에서 지금의 그 애를 만들어준 모든 것들이 좋았다.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했는지, 티비 속 어떤 드라마를 가장 감명 깊게 봤는지. 또 어느 봄의 가장 큰 고민은 뭐였는지. 온통 물음표 투성이였다.
'그땐 어땠어?' 시간을 되돌려 함께 한다 해도 그 애가 꺼내주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을 작은 머릿속의 생각들을 길게 또 짧게, 가끔은 과장해서 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덤덤하게 공유해주는 지금의 그 애가 그냥 좋았다.
이제는 이볼 없이도 손 닿을 거리에 그 애가 있었다. 함께한 모든 순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상상만으로도 타임리프가 가능했던 걸까, 눈만 감으면 언제든 그때로 돌아가 몇 번이고 함께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답지 않게 감상에 젖어있는 사이, 다시 불어오는 바람결에 벚꽃잎이 흰 눈발처럼 날리기 시작한다. 눈발은 점점 더 커져 함박눈으로 변해 내린다. 눈부시게 빛나던 벚나무는 온데간데 없었다. 다만 코끝에 닿는 눈발도, 손을 내밀어 손바닥에 내려앉는 눈발도 전혀 차갑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
언제 쌓였는지 모를 하얀 눈이 하늘 높이 솟은 나무 위를 소복이 덮고 있다. 온 세상이 눈에 덮여 새하얀 빛을 내, 나무 사이로 번져오는 해가 시리도록 눈 부셨다. 어느 여린 가지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눈밭으로 털썩 소리를 내며 고요한 풍경 속의 침묵을 깼다.
언제였을까, 벌써 몇백 년 전의 일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소중하게 자리 잡은 풍경. 바로 지금 눈으로 뒤덮인 이곳이 피로스 별의 언덕이라는 걸 기억해 내는 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익숙한 하얀 눈과 숲, 그리고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그리운 얼굴 때문에.
"심성훈! 서두르지 않으면 제 시간에 못 내려가."
나보다 느리면 어떡해, 이번에 사부님 화나시면 우리 또 벌받는다고. 잔뜩 찌푸리고 투덜대는 그리운 얼굴이 눈앞에 서 있다.
"응, 속도 낼게." 그래서 심성훈은 용기를 내 그리운 기억에 발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쌓인 눈 속으로 발이 빠져 속도를 내기 힘들었지만, 그 애는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 올라간다. 걸음마다 눈이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발목까지 차올랐지만 차갑다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금방 따라잡아 그 애 옆으로 나란히 걸었다. 하얀 눈 위로 빛과 그림자가 춤을 추며 그려내는 두 사람을 보며 걷는다.
"… 눈부시다."
곧 어느 맑은 날 올랐던 언덕 정상에 도착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언덕 아래로 펼쳐진 풍경에 눈이 부셨다. 꿈의 한 장면답게 언젠가 보았던 풍경보다 훨씬 고요하고 예뻤다. 심성훈의 머릿속으로 지구에서 봤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스쳐 간다. 그 애는 언덕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아 본격적으로 풍경을 감상했고 자연스럽게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렇게 맑은 날도 드물지만, 함박눈이 내리는 건 정말 흔하지 않잖아."
"그러게, 예쁘네."
"그냥 따라와 준 걸로만 알았는데, 너도 사실 눈이 보고 싶었던 거지?"
"응.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우주를 항해하는 기약 없이 긴 시간 내내. 하얀 눈이 얼마나 예쁜지, 맑은 날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 속에 일상을 재잘대는 그 애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두드렸다. 귓가를 간지럽게 만드는 그 목소리가 좋아서 대답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왜 대답이 없는지 늘 따라붙던 투정이 꿈에선 따라붙지 않는다. 그 애가 나누는 일상은 이제 아스트라이아에서의 고충을 지나 어느새 지구에서의 일상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예전 생각 난다."
그 애가 말하고 있는 예전은 어느 별의 추억을 말하는 걸까, 심성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 지금의 풍경을 따라가기로 했다.
"보통 겨루기를 하다 지쳐서 누워 있었지."
"감회가 새로워." 그 애가 장난스럽게 싱긋 웃으며 돌아봤다.
"아, 그거 알아? 이렇게 팔다리를 쭉 뻗고 위아래로 흔들어서…"
"짠, 일어나서 보면 별처럼 보여."
그 애가 피로스 별 어느 언덕에 흔적을 새겼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그 애의 머리끝을 따라 하얀 눈이 빛을 받아 별처럼 흩어졌다. '너도 해볼래?,' 언젠가 듣고 흘렸을 바보 같은 장난에 토를 달지 않고 기꺼이 동참한다. 그 애 옆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피로스 별 어느 언덕의 하얀 눈밭에 크고 작은 두 개의 별이 새겨졌다.
"쌍성이네."
꿈속의 그 애는 새하얀 눈 한복판에서도 반짝거리며 빛났다. 말간 얼굴엔 불안함도, 걱정도 없어 보였다. 익숙한 얼굴, 지금 나와 함께하는 그 얼굴이다. 상황을 비관하고 불안해하기보다 씩씩하게 맞서는, 정처 없이 우주를 헤매던 나를 궤도로 이끌고 또 지구로 떨어지게 만든 나의 별. 심성훈이 별로 빛날 수 있도록 소원을 빌어주던 별. 모두 같은 별인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보기로 한다. 이제는 꿈에서만 스칠 수 있는 기억 속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추위로 빨갛게 물든 볼에 입을 맞췄다.
"계속 네 옆에 있고 싶어."
그때 그 애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
"미쳤나봐…"
곧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아주 애매하고 미묘한 계절, 한겨울의 꿈을 꿨다. 굳이 가슴에 손을 얹지 않아도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양 볼이 덴 것처럼 뜨거웠는데, 아주 흐릿한 꿈의 조각 속에서 마지막 고백과 볼에 닿았던 뜨거운 입술만이 아직도 닿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는 나와 마주 보고 누워 계속해서 함께 있고 싶다고 고백했다.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의 고백이라고 말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아도 알고 보면 하나하나 전부 내 무의식 속에 남은 욕망의 분출이라고 했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꿈에서… 베개로 얼굴을 가려보아도 부끄러운 마음은 가려지질 않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아니, 고작 손바닥 하나로 온 우주를 가리려 하고 있었다.
다시 잠이 오질 않아 뒤척이길 수십번, '야옹-' 창밖으로 아기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주어진 휴일이니 당장의 쿵쿵대는 심장을 달랠 겸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잠옷을 가려줄 얇은 외투를 걸쳐 입고 얼마 전 그와 함께 사둔 고양이 간식을 하나 챙겼다. 소리를 따라나서기로 한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로비 버튼을 누르고 다시 한번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려 숨을 골랐다. 거울에 비친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정리하고 괜스레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간식을 톡톡 두드려본다. 머리 위 알림판엔 곧 1층에 도착한다는 화살표가 숫자와 함께 반짝였다.
*
"잠이 안 와?"
말로만 듣던 몽중몽일까? 꿈에서 본 얼굴이 바로 지금, 눈앞에서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만남에도 늘 그렇듯 놀란 기색 없이 평소와 같은 얼굴로 벤치 옆자리를 손으로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여기 앉아.' 그리곤 두드린 자리를 손으로 쓱 한 번 훑어낸다. 그는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 세심하게 굴어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가 놨다 하곤 했다. 바람결에 실려 온 풀 냄새가 마음을 울렁이게 만들고 있었다. 볼에 다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이건 성훈씨 때문이 아니다. 풀과 여름 냄새를 동시에 담고 계속해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 때문이니까.
"사실 한참 잠들었다가 깼는데 다시 잠이 안 와서요."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그건 아니에요."
시선을 발 끝에 둔 채 애꿎은 신발 끝을 바닥에 툭툭 두들기며 대답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긴 했지만, 평소엔 잘만 마주치던 그 눈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냥 조금… 잠이 안와서 깨어있다 고양이 소리를 듣고 나왔는데 마침 성훈씨가 있네요."
"그런데 어쩌지, 고양이는 방금 배부르게 먹고 담장 너머로 떠났어."
톡톡, 캔을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나도 고양이 소리를 따라왔거든."
한밤중 가로등 아래에서 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는 두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이 꼭 오늘 밤의 꿈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초여름 바람의 핑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손쓸 방법이 없었다.
"우리 통했네." 그가 내 손에 들려있는 것과 똑같은 캔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꿈에서 봤던 웃는 얼굴 그대로.
*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 어느새 5월 21일. 얼굴에 열이 오른 나를 걱정하는 그와 예정에 없던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잘 자.' 침대에 누워 방금 나눈 문자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는다. 고개를 돌리면 협탁 위, 그대로 돌아온 간식 캔과 밀크티 한 잔이 놓여있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 몇 줄기가 주르륵 흘러 컵 바닥에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물방울이 바닥으로 흘러내릴 때마다 웅덩이 위로 작은 물결이 번진다.
빨개진 얼굴을 걱정하며 이마에 닿았던 손이 다시금 떠올라 가만히 이마에 손을 올려본다. 커지는 마음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쿵쿵 내려앉아 가슴에 작고 큰 진동을 만들었다. 왠지, 이번에는 절대 잊지 않을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 좋은 꿈, 꿈보다 더 꿈 같은 따스한 오늘의 가로등 빛을 마음에 품고서.
